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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

요한계시록 수신자들의 삶의 정황: 황제숭배, 이교의 신 숭배,정치적 박해, 경제적 고난

by 꿀송이엄마 2025.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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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수신자들의 삶의 정황: 황제숭배, 이교의 신 숭배,

정치적 박해, 경제적 고난

 

회람서신의 형식을 갖춘 서신서인 요한계시록은 다른 서신서들과 마찬가지로 의도된 수신자들이 있었다(1:4, 11).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지금의 터키에 속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이며 최초의 독자들이다.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에게는 최초의 독자라는 말보다 최초의 청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예배 중에 구술적으로 낭독되도록 의도되어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수신자들은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예배모임 때에 큰 소리로 요한계시록을 읽었다.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일곱(1:4, 11)”이라는 완전한 숫자를 가지고 있다. 이 완전한 숫자는 비록 일차적인 수신자들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라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대상들이지만, 모든 교회에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초석이 되어야만 한다.

 

그 초석에 근거하여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교회에 요한계시록을 적합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신자들이 처했던 삶의 정황을 아는 것은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서신의 내용으로 하여 전했을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따라서 삶의 정황에 대한 이해는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을 알게 해 주는 방편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일곱 교회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고린도전서 14:30의 기록으로 볼 때, 초대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는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사도 요한도 그러한 선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고전 14:29-30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은 예배모임에서 하나님께 받은 신탁을 전달했다. 선지자들은 계시를 받았을 때 교회의 모임에서 그것을 선포했다. 계시는 성령의 영감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들을 의미한다. 또한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은 환상적 계시들을 받고 그것을 교회에 보고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로 삼아 편지를 보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예배모임에서 선지자로 활동했기에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까지 약 40km 정도 되는 길을 걸어서 순회하면서 일곱 교회를 목회했다.

 

일곱 교회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도 요한은 그의 수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소망과 위로를 주고자 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소망과 위로가 필요했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그들의 삶의 정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들의 삶에 있어서 역사적 상황, 사회문화적 상황, 경제적 상황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고난으로 내몰고 있었다.

수신자들의 고난의 진원지는 황제숭배였다. 황제숭배는 요한계시록에서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고난으로 다가왔다.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는 처음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주전 44)와 아우구스투스(주전 27-주후 14)를 신격화하는데서 시작되었고 클라우디우스(주후 41-54)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주후 69-79)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황제를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사후에 황제를 신격화한 것이었다. 티베리우스(주후 14-37)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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