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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 그리스도의 재림(계 1:7)

by 꿀송이엄마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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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 그리스도의 재림(1:7)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며 강조되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1:7; 22:7, 12, 20).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의 프롤로그(1:1-8)와 에필로그(22:6-21)는 수미쌍관법(Inclusio) 구조를 이룬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명백하게 나타난 공통적인 주제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재림에 대한 계시는 상징을 통해서, 사도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포를 통해서 나타난다.

 

재림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체의 완성의 책이다. 구약으로부터 예언되어 온 구속사의 모든 과정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왕으로서 높임 받으심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 구속사의 전체 과정은 이제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종합적인 구속사적 전망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에는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언이 세 번이나 나타난다(22:7, 12, 20). 그것은 역사적 종말의 실현이 속히 다가올 것을 확증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영적인 각성과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다.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재림의 약속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은 그 약속의 긴급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재림의 임박성과 재림의 지연에 대한 주제가 함께 나타난다. 재림에 대한 소망의 말씀이 거의 전달되지 않고 있는 현재 시대의 교회들에게 주시는 계시록의 마지막 메시지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는 그리스도의 음성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사도 요한의 응답이다(22:20).

 

메쯔거(B. M. Metzger)에 의하면,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역사적 종말이 곧 임할 것이라는 사실은 연대기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삶의 차원이다. 메쯔거는 모든 계속되는 세대는 항상 마지막 세대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재림은 항상 가깝다(22:10)고 말한다.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윌코크(M. Wilcock)에 의하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응답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과 우리의 경험 속으로 오시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내포한다.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실 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는 소망의 신앙은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시록 22:6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1:1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반복한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속히일어나야 할 세상의 종말이 왜 아직 오지 않았는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재림과 연관된 것은 분명하다. 재림을 포함한 역사적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결심이 확고하기 때문에 그 사건들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은 인간의 관점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의 눈에는 세상의 종말이 멀리 떨어진 일로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미래가 가까운 목전에 있다. 하나님은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물리적인 개념이며(크로노스의 시간, χρόνος) 하나님은 창조세계에 속한 물리적 시간 개념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넘어선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카이로스의 시간, καιρς).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다(벧전 3:8).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께는 재림의 약속이 여전히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1:1)”이나 때가 가까움이라(1:3)”라는 표현들은 미래의 사건이 언제라도 성취될 수 있다는 긴박성을 강조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지금 재림을 위해 세상의 문간에 서 계셔서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오실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러한 긴박한 용어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특정한 시간에 일어날 것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장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윤리적 삶의 요청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속히라는 말은 연대기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며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물리적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재림과 종말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미 재림을 포함하는 역사적 종말의 때를 정하셨고 그 시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 재림의 때는 하나님의 시점에서 이미 정해졌으며 구원 역사 속에서 그 사건은 항상 가까이에 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회개를 통해 불의와 더러움을 의와 정결로 바꿀 시간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22:11).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그리스도 자신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선언(22:7, 12, 20)은 성도들과 불신자들에게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라는 윤리적 삶의 요청으로 다가온다. 이천 년이 넘게 지연된 재림에 대해 우리는 나태해졌고 안일해졌다. 재림의 날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신데도 마치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안은 결코 재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처럼 게으른 신앙생활을 한다.

 

재림의 날에 심판과 상급을 베푸시는 그리스도 앞에 우리 각자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것인가? 재림을 고대하는 최고조의 상태로 살았던 1세기 사람들과 달리 오늘날 우리는 재림의 소망을 거의 상실한 상태로 살고 있지 않은가? 요한계시록을 사랑하고 열심히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재림의 소망을 되살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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